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직봉전쟁 (문단 편집) === [[진윈펑]] 내각의 붕괴와 [[량스이]] 내각의 출범 === 그러던 중 1921년부터 대규모 경제위기가 도래하여 중국이 혼란에 빠졌다. 9개월이나 군비 지급이 중단되면서 각 지방의 군벌들은 모두 아우성이었고 11월 14일 급여를 받지 못한 교육부가 동맹파업에 돌입하였다. 이어 참모부가 자동으로 해산을 요청했으며 육군총장 채성훈, 해군총장 이정신, 사법총장 동강 등이 모두 사직을 청했다. 11월 16일에는 베이징, 톈진, 한커우의 중앙은행과 교통은행에서 대규모 예금 인출이 벌어졌다. 하지만 교통계가 장악한 은행단은 진윈펑 내각의 붕괴를 원했기 때문에 도움을 주지 않고 방관했다. 또한 장쭤린과 차오쿤 모두 진윈펑 내각이 편향적이라 여겼기 때문에 진윈펑을 더 이상 돕지 않았다. 장쭤린의 경우, 진윈펑 내각이 우페이푸를 양호 순열사로 승진시킨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고 차오쿤은 진윈펑 내각이 장쭤린에게 몽골 원정 예산으로 700만원을 할당해주었으며 직계의 섬서 원정 예산은 고작 100만원만 책정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때 교통계의 엽공작이 장쭤린에게 교통은행을 장악하여 재정권을 틀어쥐라고 제의하며 장쭤린과 결탁하였고 장쭤린은 호응하여 교통은행에 동삼성 공금 400만원을 빌려주었다. 12월 12일, 장쭤린이 텐진으로 오자 진윈펑은 장쭤린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텐진으로 가서 장쭤린을 만났고 장쭤린과 연명으로 차오쿤을 초청하여 현안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의했으나 차오쿤은 우페이푸가 텐진행을 반대하자 칭병하여 초청을 거절했다. 12월 14일 장쭤린과 진윈펑이 베이징에 왔는데 장쭤린은 자신은 군인이므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면서도 쉬스창에게 개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쭤린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진윈펑은 12월 17일 사퇴하여 톈진으로 떠났다. 12월 18일 쉬스창은 진윈펑의 사직을 비준, 외교총장 옌후이칭을 내각총리 대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차오쿤에게 차기내각을 상의하자고 베이징으로 초청하여 12월 18일 차오쿤이 베이징에 왔다. 이때 장쭤린은 교통계의 [[량스이]]를 새 국무총리로 추천했다. 직계는 량스이를 좋아하지 않고 특히 우페이푸는 베이징에 있어봐야 장쭤린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라고 강하게 반대하며 베이징을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량스이가 밀린 군비 지급에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제의하자 차오쿤은 량스이의 총리 임명에 동의, 12월 24일 량스이가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12월 25일 취임했고 외교총장에 옌후이칭, 내무총장에 고릉위, 재정총장에 장고, 육군총장에 포귀경, 해군총장에 이정신, 사법총장에 [[왕충후이]], 교육총장에 [[황옌페이]], 농상총장에 제요산, 교통총장에 엽공작을 임명하였다. 이를 본 차오쿤은 12월 31일 바오딩으로 돌아갔고 장쭤린도 1922년 1월 2일 봉천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량스이 내각의 출범은 직봉의 결정적인 결렬을 가져오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